Right now it is difficult to translate in Japanese and English, next time I will try again.

See you then.
 

   2005년 1월24일부터 2월6일까지 일본의 Tokyo와 Osaka를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2월1일~6일까지 오사카 ATC센터에서의 ‘오사카 아트페어’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장차 나의 작품 활동 무대를 넓히기 위함이 더 컷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 화랑가 Ginza와 주요 미술관이 운집한 Ueno 탐방은 유익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환상과는 많이 다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번째 인상은 마치 소인국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200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첫 인상인 거대한 공룡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나리따 공항에서 동경시내로 들어갈 때까지 약 1시간 동안 내 시야에 들어온 주택들은 마치 성냥갑을 오밀조밀하게 모아놓은 형상이었다. 이웃집과의 거리는 손바닥으로 몇 뼘 정도면 맞닿을 정도로 답답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체형 또한 무척 작았다. 대부분의 선진국 사람들의 체형이 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도로폭도 무척 작았다. 자동차의 대부분은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앙증하기 짝이 없는 마치 성인용 장난감 같은 것들이 즐비했다.


   무엇보다 감당하기 힘든 것은 대부분의 여행에서 겪게 되는 먹거리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곳의 상황은 경우가 달랐다. 主食이 한국처럼 쌀과 밀가루 가공식품인 것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음식값은 거의 살인적이었다. 물론 같은 동경 내에서도 시내 중심지역인 긴자와 약간 외곽지역인 우에노와는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래봤자 한국과 비교할 때 3배에서 2배로 정도의 차이는 여전했다. 무엇보다 한결같이 양이 너무 작았다. 그리고 한국처럼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기본적으로 반찬 몇 가지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이곳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우에노의 시장 골목에 있는 대중적인 식당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저녁을 먹은 후 후식이 생각나 잠깐 벽면에 걸려있는 딸기 3개를 한 접시에 담은 사진속의 가격표를 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330엔 즉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천5백원쯤.

  

   어쨌든 나의 장기적인 미술활동 무대로의 진출에 큰 꿈을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집중적인 탐방은 계속되었다. 한번은 긴자의 화랑가에서 그곳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화랑의 관리인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일본 미술계의 실태를 정확히 짚어볼 수 있었다. 비록 대부분 화랑들이 한국과 비교할 때 상상하기 힘든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긴 했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일반인들의 진지한 관심이 저변에 깔려있기에 아직도 긴자거리에 3백 개가 넘는 화랑이 건재함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다수의 화랑들이 지금은 대관위주로 운영되고 있고, 화랑의 숫자가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할 때 반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긴자의 화랑가와  우에노 에서의 여러 미술관에서 본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구부리면서 긴 줄을 잇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포함한 수많은 관객들의 예술을 사랑하는 열기는 수년 동안 최악의 불황을 맞고 있는 일본경제의 힘든 그늘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엿 볼 수 있었다.


   금년이 한일 수교 40주년의 해라 그런지 특히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한국의 대중 스타를 중심으로 서점의 한 코너를 한국관련 내용들로 진열한 것은 물론이었고 이곳의 대표적 TV방송에서 한국의 드라마가 재방영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관심의 정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 미술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관심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다.

앞서 언급한 긴자에서의 상당한 수준의 화랑인 즉, ‘미술세계’ 갤러리에서 한국작가 박창돈의 작품을 특별 기획전 하고 있는 것을 봤는데, 최고수준의 화랑답게 세련된 분위기뿐만 아니라 노년의 원숙함과 깊은 정신적 깊이감이 느껴지는 걸작들을 낯선 이국땅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가끔 그 분의 작품을 한국에서 대충  본 기억은 있었지만 금번처럼 한꺼번에 우수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품밑에 붙여진 가격표를 보고서 다시 한번 경제대국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 화랑관리인에게 왜 한국작가들의 전시를 자주 기획하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에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국제적 경쟁력이 있기에 특히 최근 들어 자주 전시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한말은 지금도 가슴 뿌듯하게 와 닿는다.

적어도 10년 내에 나도 그러한 위치에 오를 수 있기를 기약하면서...


   동경에서의 1주간의 강행군을 마친 후 밤 고속버스 편으로 오사카에 도착했다.

동경보다는 덜 복잡한 것이 다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전시를 한 ATC Center는 거대한 건물들이 함께 있는 아름다운 항구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시내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짧지만 바다 밑을 지나는 구간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그 구간을 이용할 때는 다른 구간보다 몇 배 더 비싼 지하철 요금을 감당해야했다.  숙소에서 불과 15분 거리인데 지하철 요금이 약 5천원이라니, 다른 구간이라면 2천원이면 될 것을... 이것이 일본의 정서인가보다. 비슷한 메뉴의 음식을 먹더라도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과 서서 식사하는 곳의 음식값이 다르고, 라면에 밥 한 공기를 먹더라고 라면위에 얹어준 돼지고기가 한 조각이었을 때와 두 조각 그리고 세 조각일 때의 가격표가 각기 다른 것을 봤을 때 숨막힐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꼭 필요한 것 외엔 절대 낭비하지 않는 모습은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지 자전거 천국인 동경과 오사카의 풍경, 하다못해 동경예술대학의 학장도 자전거로 출근할 때가 더 많다는 동경예술대학 유학생의 이야기가 남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부자나라가 될 수 있었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 경제선진국의 현주소인지 모르겠다.

 

   오사카에서의 전시는 한일수교4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의미로 여러명의 한국 국회의원들과 그곳의 정치인들이 참여한 화려한 포장과는 대조적으로 실망스러웠다. - 하긴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 개인부스를 마련한 후 금번 전시에 참여한 한국작가 70명 중 약50~60여명이 전시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일본작가도 약 10~20명 함께했다.  일본작가의 수준과 레벨을 말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한국작가의 경우엔 그래도 우수한 작가들이 다수 참여했다.

   금번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화 전공이라서 그런지 한국화 전공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웠던 것은 여러가지로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홍보부족으로 관객들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작가와의 대담 시간에 한국의 모 대학 교수의 말처럼 “이렇게 관객이 적은 초라한 모습은 이곳에 참여한 우리(작가)만 아는 것으로 덮어두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냥 흘려버릴 것은 아니었다.


   금번 전시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각 작가들은 300만원의 참가금을 내야했다. 작품운송, 전시장사용료, 개인팜플렛, 종합팜플렛, 전시홍보, 보조요원(통역 및 기타), 오픈 및 만찬비용 등이었다. 물론 비행기 요금과 숙박비는 추가로 드는 작가 측 몫이었다.  대부분 약 400 만원의 총 경비가 소요된 금번 전시에서 작품을 판매한 작가는 공식적으로 한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미술계가 불황의 터널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후문으로 들은 것으로 일본측의 사기성이 있었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공을 들인 좋은 전시라 하더라도 관객이 적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시장에 있는 동안 일부 관객들과 나눈 대화에서 느꼈던 것에서 그림을 보는 그들의 통찰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원래 그림이라는 것이 그렇듯 적게는 수 십만원에서 수 백, 수 천만원 짜리 작품을 선뜻사간다는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선 있을 수 없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혹 일본의 환율이 우리나라의 10배이니까 이곳에서 100만원짜리를 1000만원에 팔 수 있으리라 혹은 이곳에서 100만원짜리를 일본에서 10만원에 팔아도 이곳과 비슷한 성과를 거두리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나라는 부자이지만 일반시민들의 생활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나치게 말한다면 궁핍하기까지 했고 삶의 구석구석에 베인 절약정신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몇 번을 곰곰히 다시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정서라 했다. 그리고 긴자의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이곳에서도 판매의 주종을 이루는 가격대는 100만원에서 200만원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했다.

 

   그동안 세계 톱 뉴스를 장식한 일본인들의 천문학적인 금액의 화려한 작품구입 기사와 전세계 미술 시장의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는 통계는 예외적인 극소수의 큰 손들에 의한 것일 뿐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앞서 긴자의 '미술세계'화랑에서 원로 작가 박창돈의 4호정도 짜리가 약 천백만원에 팔린 빨간 딱지와 그리고 40호 크기의 그림이 평균 7~8천만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켤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작품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관객들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올 수 있도록 그동안 뿌린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화랑 관계자의 말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교훈으로 남는다.


   다행히 나는 금번에 나름대로 뜻깊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본 전시에서의 결과보다 앞으로  큰 경비부담없이 초대전과 같은 형식을 엮어서 계속 작업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이 화랑 저 화랑 각종 자료를 들고 발로 뛰었는데,   동경의 1~2곳의 화랑에서 내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오사카의 1개 화랑에선 초대전으로 전시를 갖고 싶다는 직접적인 제의를 받았기에 일단 일본진출의 발판은 마련한 셈은 아닌지, 물론 수준높은 유명한 화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비싼 땅에서 나를 초대해서 전시를 열고자한 이유는 분명 내 작품이 그들의 눈에 객관적인 예술성에서 경쟁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에서 그리고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오직 작품성 만으로 정당한 인정을 받고 싶고 당당히 더 넓은 세상을 향하고 싶다.  아쉬운 것은 오사카에선 전시장에 주로 머물렀기 때문에 화랑을 거의 둘러볼 수 없었다. 듣기론 오사카 지역에도 200여개의 화랑이 있다고 했다.

   오사카에서의 초대 개인전 일정은 아직 정확히 결정짓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5월의 미국전 참여와 6월의 울산전 그리고 8월의 호주전이 너무 빡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에서의 초대전과 10월 중순으로 생각하고 오사카전은 모두 해외에서의 초대전이기에 나로서는 매우 뜻 깊게 생각하고 있다.


   이곳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에서 그린 내 그림이 국경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하 감동으로 다가가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앞으로도 뜻 깊은 일본에서의 추억을 오랫동안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

                                                                                                  2005,2,15